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3세 (문단 편집) === [[보불전쟁]]과 몰락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백부]] 코스프레를 하면서 직접 전선으로 출전했으나 정작 그의 군사적 능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데군데 들리는 포성과 함성 소리, 병사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나머지 보다 못한 측근들이 얼굴에 혈색이 돌게 보이게끔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여러 차례의 삽질 끝에 [[스당 전투|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하며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는데,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프랑스군 진지 내를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다. 그를 수행하던 장교 하나는 포탄에 맞아 죽었고 옆에 있던 군의관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이 인간이 여기에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 내내 어떤 명령도 내린 것이 없다.''' 결국 1870년 9월 1일 오후 항복하여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에 파리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황제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기에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파일:2DEEBC94-8D0C-4B6B-B8FA-D32A9B38D26E.jpg]] [[1878년]] 독일의 화가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1818 ~ 1885) 작품,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 독일 [[카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복위를 꿈꾸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총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가 완전히 몰락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더 이상 제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기존의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던 보수세력들이 양대 왕당파인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로 지지를 옮겼다. 이들 양대 왕당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2공화정처럼 3공화정도 단명하고, 군주점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오를레앙가에 앙심이 있던 [[앙리 5세]]가 즉위를 거부함에 따라 계획이 트러졌고, 결국 1876년 총선에서 정권을 상실하고, 공화파가 의회 다수파를 지속적으로 차지함에 따라 공화정이 정착되었다. ] [[1871년]] 3월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권좌를 되찾기 위해 지지자들을 모아 쿠데타를 다시금 계획했지만 [[1873년]] 1월 [[요로결석]][* 요로결석이 심각했는데 [[비둘기]]의 [[알]]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프랑스에서 제정 관계자 1만 명 이상이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유해는 당초 망명지인 틸즈허스트의 마을묘지에 묻혔지만,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배려로 햄프셔 북동쪽 판버러(Farnborough)에 있는 성 미카엘 대수도원(St Michael's Abbey)에 안장되었다. [[파일:external/stephanekirkland.com/P1160021.jpg|width=500]] 죽기 전 주치의와의 대화가 '''"[[스당 전투|스당]]에서 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내용이었을 정도로 죽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겁쟁이로 매도당하는 걸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가 죽자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그에게 아첨하던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쏴죽인 조르주 당테스 남작이었다.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여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폐위와 몰락 이후 숨어서 살며 20년 넘게 비참하게 살다가 83세인 1895년에 쓸쓸하게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